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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자원 1000

광주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

역사문화자원 1000

  • 광주읍성 유허 光州邑城 遺墟

    • 시대분류고려시대 말~조선시대
    • 주제분류유형문화유산/유적지
    • 주소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2-2번지
    • 표제어광주읍성, 광주읍성 유허, 성돌, 복원
내용
광주시 동구 광산동 충장로와 금남로 일대에 있던 조선시대 읍성 일부를 복원한 터이다. 언제 축조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조선 태종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나주와 보성에 성을 축조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늦어도 이 무렵 광주읍성도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광주읍성은 무진성, 광산성이라고도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에 작성된 지리지에는 대부분 ‘광주읍성은 돌로 쌓았고, 둘레가 8,253척, 높이가 9척, 성문은 4개, 우물은 100개이며 못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서남북으로 난 4개의 성문은 각각 서원문(瑞元門), 광리문(光利門), 진남문(鎭南門), 공북문(拱北門)으로 불렸다. 지승, 광여도, 해동지도, 여지도, 1872년 지방도 등 고지도에는 광주읍성이 방형으로 그려져 있고 광여도는 ‘완전한 방형’, 비변사인 방안지도에는 ‘정방형의 읍성’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각형에 가까운 형태다. 최소 500년 이상 광주 치소의 중심지였을 광주읍성이 언제 철거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일제의 간섭과 의병이 탄압되기 시작한 1908년부터 1918년 사이에 철거되었으며, 4대문의 위치와 성 밖에는 주위에 물길을 만든 도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888년 일본이 펴낸 조선지지략에 ‘광주읍성은 흙으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미 그 전에 석성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옛 문인들이 쓴 시문을 보면 광주읍성은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입은 것을 알 수 있다. 인조대 문인으로 1631년 전라도 도사를 역임한 서정연은 ‘광산은 큰 고을이지만 성곽과 인민들이 난을 겪고 난 후 열 집 중 여덟 아홉 채가 모두 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주읍성은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옛 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1992년 구 전남도청 주차장 부지를 만들기 위한 공사와, 1996년과 1997년 전력선 지중화 공사를 위해 황금동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지하에 매장된 성벽과 성돌 일부가 발견되며 광주읍성 터였음을 확인했다. 성벽 기단부의 폭은 3.4~4m였다. 현지보존이 어려운 성돌 일부를 1997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앞뜰에 이전, 복원하였다. 2006년과 2007년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조성하면서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벽을 이루던 성돌과 해자 등을 확인했다. 2014년 성벽을 이루던 성돌을 활용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위에 읍성 일부구간을 복원했다.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광주읍성, 2013.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