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이야기
100가지의 광주역사문화자원
스토리 100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남광주역 벽화
남광주역은 사라지고 현재는 푸른길 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사진은 천변우로 남광주시장 입구 옆 푸른길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그려진 남광주역 안내 벽화.
광주 출신 시인 곽재구의 대표 작품으로 꼽히는 「사평역에서」라는 시에 등장하는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는 역 이름이 아니다. 시인이 직접 체험한 남광주역을 떠올리며 쓴 시로 알려져 있다. 「사평역에서」라는 시에는 당시 남광주역을 드나들던 서민들의 애환이 녹아있는 것을 엿볼 수도 있지만 당시 남광주역의 시대적 배경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할 말들은 가득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에서 드러난 대합실 안 풍경. 난로 속 톱밥이 타닥거리는 소리와 눈꽃이 쌓여가는 소리 이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 곽재구가 살았던 광주의 80년 5월 민주화운동과 군부독재에 짓밟혀 유린당했던 인권학살의 시대가 그 배경이 되어 묘사되고 있다. 각자의 애환 담긴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기차를 타기위해 기다렸던 장소. 남광주 역을 소개한다.
1930년 경전선 개통과 함께 개설된 '남광주역'
1930년 12월 광주와 여수를 잇는 경전선 개통과 함께 개설된 '신광주역新光州驛'으로 시작한 '남광주역'은 1938년 4월 남광주역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푸른길 방문자센터
2013년 옛 남광주역 플랫폼 위치에 건축되었으며, 푸른길 공원 탐방객들에게 안내 및 자료 제공 등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당시의 광주 중심시가지에서는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했던 남광주역은 전남의 중심이 되는 교통요지로 자리 잡았다. 역이 생긴 뒤로 새벽부터 농산물이며 해산물을 이고 올라와 파는 사람들로 가득해 역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장터가 들어서게 된다. 남광주역으로 인해 도심 한가운데서 바다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고, 작은 역사 앞 광장을 중심으로 남광주시장이 형성되었다. 매일 아침이면 시장은 활기찬 소리로 가득차고 통학하는 주변지역 통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분주하게 역을 오갔다.
도심 속 역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남광주역도 도심에서 밀려나는 운명을 맞는다. 도심 속 철도의 문제점인 소음과 진동피해, 그리고 잦은 인명피해는 이용객 감소의 원인이 되었다.
도심으로의 접근성이 떨어지면서 열차를 타고 통학하던 학생들의 수도 점차 줄어들고, 결국 남광주역의 기능이 지금의 광주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도심을 가로지르던 경전선 철로와 남광주역은 2000년에 이르러 사라지게 되었고 남광주역 역사는 폐역 두 달 만에 주차장이 생기게 된다.
새벽시장의 불빛 아래 들판과 포구의 산물이 펼쳐지다
남광주시장은 남광주역의 개설과 함께 역 주변으로 생겨난 시장이었다. 차가 흔치 않던 시절, 남광주역을 향하는 첫 기차에는 보성, 조성, 앵남, 이양 등 남도 전역의 사람들이 나물이며 곡식 등을 이고지고 탔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서면 색색의 보따리를 인 시골아낙들이 역전광장으로 쏟아졌다. 약초를 캐서 들고 나온 어르신들, 고추며 배추며 온갖 나물에 푸성귀, 남광주 역전시장은 없는 것이 없는 거대한 장이었다.

남광주시장
남광주역이 생기며 형성된 시장은 새벽 수산물시장이 유명하다.
동구청은 최근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밤기차야시장을 개장하고 대인시장에 이은 명소로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광주역 절반은 수산시장이다. 득량만에서, 영광에서, 완도나 진도에서 올라온 수산물들이 새벽 두세 시면 트럭을 타고 이곳 수산시장에 도착을 한다. 70~80년대에는 여수, 목포, 벌교 등지에서 잡은 해산물 및 패류들이 밤기차를 통해 새벽녘 이곳 남광주 시장에 집하되었다.

풍성한 수산물
남광주역이 사라지면서 시장의 활력도 예전같지 않지만 새벽부터 장이 섰던 그 시절의 활력만큼은 여전하다.
워낙에 다양한 농산물을 지고 올라오던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던 시장인 만큼 사람들도 북적거렸다. 일찍 나와 조금이라도 더 싱싱한 물건을 싼값으로 사기위해 흥정하는 사람들로 남광주 시장은 장관을 이루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역전시장에는 물건을 팔기 전에 사람을 끌어 모으는 사전이벤트로 차력사들의 공연이 있었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차력사들의 불쇼에 넋을 빼곤 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보니 국밥집이며, 보리밥집 같은 값싼 먹을거리들도 많았다. 역에 물건을 팔러오는 시골사람들과 인근 서민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옷가게, 신발가게, 화장품집, 생활용품점들이 시장골목마다 가득했다. 시골사람들을 주고객으로 하기에 신발가게에는 농사용 장화나 털신이 있었고, 철물점에는 낫이나 호미가 고객을 기다리곤 했다. 종일 나물이나 알곡을 팔아서 신발 한 켤레, 내복 한 벌을 사들고 기차로 돌아가는 이들이 남광주 역전 시장에 늘 있었다.
역은 없어졌지만 기차가 멈추던 플랫폼은 푸른길 공원이 되었고, 지금도 매일같이 새벽장이 선다. 여느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활력이 여전하다. 기차 대신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오는 장꾼들이 새벽시장을 가득 채운다.
5․18의 아픔을 주먹밥으로 함께 했던 시장사람들
5․18 당시 이곳 남광주 시장에 있던 파출소는 시민들의 손에 불태워졌다. 시장 바로 앞 전남대학병원에는 피 흘리는 부상자들이 속속 수레에 실려 도착하는데 경찰들은 시민들을 지키지 못했다. 오히려 계엄군의 협조자가 되었다. 성난 시장사람들은 전남대학병원이 바라다 보이는 남광주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집기를 태웠다.
남광주시장 사람들은 돈을 걷거나 김, 쌀 등을 걷어서 밥을 하고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의 차에 실어주었다. 시장에 살림집을 두고 살던 많은 남광주 상인들은 솜이불로 유리창을 막고, 총알이 들어오는 것을 피해야했다. 그리고 항쟁의 마지막 새벽 시민군들을 향한 총성을 들으며 눈물을 삼켜야했다. 전남대병원 앞에 있는 5․18낙지집은 그러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남광주시장의 새바람 '남광주 밤기차야시장'
남광주시장에 또 다른 바람이 불고 있다. 남광주시장은 행정자치부에서 시행한 2015년 전통시장 야시장 공모사업에 최종 선정되었다. 오랜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2016년 11월 18일 정식으로 개장해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남광주시장상인회와 남광주 해뜨는시장 상인회가 공동으로 조성계획을 수립한 '남광주밤기차야시장'은 추운 겨울밤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붐빈다.
남광주역 광장에는 청년들이 패기와 참신한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푸드트럭이 즐비하다. 음식 맛을 보기위해 긴 줄을 지어 기다리는 큐브스테이크를 비롯해 베트남음식, 양꼬치 구이까지 맛 향연이 이어진다. 긴 기차모양 행렬로 시장 안에 음식 자판들이 이어져 있으니 광장에서 배를 채웠다간 낭패다.
"퇴근하는 길에 아이와 함께 들려봤는데 밤기차시장이라더니 매대들도 귀여운 기차모양을 하고 있어 아이들도 즐거워해서 좋아요!"라고 말하는 젊은 부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야시장을 돌며 한 주의 피로감을 풀어낸다.
비슷한 물건들이 나와있는 것 같지만 이 세상에 같은 시장은 없다. 옆집과 앞집과 뒷집은 나와 비슷한 쌀을 매일 먹지만 어느 집 하나 나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다. 남광주시장에서 만나는 장꾼들에게는 어느 시장보다 강인하고 끈끈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남광주라는 활력 넘치는 자리, 그리고 오랜 시간 그곳을 지켜온 시장의 저력때문인지 모른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남광주역 벽화
남광주역은 사라지고 현재는 푸른길 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사진은 천변우로 남광주시장 입구 옆 푸른길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그려진 남광주역 안내 벽화.
'할 말들은 가득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에서 드러난 대합실 안 풍경. 난로 속 톱밥이 타닥거리는 소리와 눈꽃이 쌓여가는 소리 이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 곽재구가 살았던 광주의 80년 5월 민주화운동과 군부독재에 짓밟혀 유린당했던 인권학살의 시대가 그 배경이 되어 묘사되고 있다. 각자의 애환 담긴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기차를 타기위해 기다렸던 장소. 남광주 역을 소개한다.
1930년 경전선 개통과 함께 개설된 '남광주역'
1930년 12월 광주와 여수를 잇는 경전선 개통과 함께 개설된 '신광주역新光州驛'으로 시작한 '남광주역'은 1938년 4월 남광주역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푸른길 방문자센터
2013년 옛 남광주역 플랫폼 위치에 건축되었으며, 푸른길 공원 탐방객들에게 안내 및 자료 제공 등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도심 속 역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남광주역도 도심에서 밀려나는 운명을 맞는다. 도심 속 철도의 문제점인 소음과 진동피해, 그리고 잦은 인명피해는 이용객 감소의 원인이 되었다.
도심으로의 접근성이 떨어지면서 열차를 타고 통학하던 학생들의 수도 점차 줄어들고, 결국 남광주역의 기능이 지금의 광주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도심을 가로지르던 경전선 철로와 남광주역은 2000년에 이르러 사라지게 되었고 남광주역 역사는 폐역 두 달 만에 주차장이 생기게 된다.
새벽시장의 불빛 아래 들판과 포구의 산물이 펼쳐지다
남광주시장은 남광주역의 개설과 함께 역 주변으로 생겨난 시장이었다. 차가 흔치 않던 시절, 남광주역을 향하는 첫 기차에는 보성, 조성, 앵남, 이양 등 남도 전역의 사람들이 나물이며 곡식 등을 이고지고 탔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서면 색색의 보따리를 인 시골아낙들이 역전광장으로 쏟아졌다. 약초를 캐서 들고 나온 어르신들, 고추며 배추며 온갖 나물에 푸성귀, 남광주 역전시장은 없는 것이 없는 거대한 장이었다.

남광주시장
남광주역이 생기며 형성된 시장은 새벽 수산물시장이 유명하다.
동구청은 최근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밤기차야시장을 개장하고 대인시장에 이은 명소로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풍성한 수산물
남광주역이 사라지면서 시장의 활력도 예전같지 않지만 새벽부터 장이 섰던 그 시절의 활력만큼은 여전하다.

남광주시장 내부
62개의 노점과 288개의 점포가 입점해 있으며, 그 가운데 91개의 점포가 수산물 업종으로
수산물 대표시장으로써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해 뜨는 시장, 남광주 역전 시장 62개의 노점과 288개의 점포가 입점해 있으며, 그 가운데 91개의 점포가 수산물 업종으로
수산물 대표시장으로써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워낙에 다양한 농산물을 지고 올라오던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던 시장인 만큼 사람들도 북적거렸다. 일찍 나와 조금이라도 더 싱싱한 물건을 싼값으로 사기위해 흥정하는 사람들로 남광주 시장은 장관을 이루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역전시장에는 물건을 팔기 전에 사람을 끌어 모으는 사전이벤트로 차력사들의 공연이 있었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차력사들의 불쇼에 넋을 빼곤 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보니 국밥집이며, 보리밥집 같은 값싼 먹을거리들도 많았다. 역에 물건을 팔러오는 시골사람들과 인근 서민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옷가게, 신발가게, 화장품집, 생활용품점들이 시장골목마다 가득했다. 시골사람들을 주고객으로 하기에 신발가게에는 농사용 장화나 털신이 있었고, 철물점에는 낫이나 호미가 고객을 기다리곤 했다. 종일 나물이나 알곡을 팔아서 신발 한 켤레, 내복 한 벌을 사들고 기차로 돌아가는 이들이 남광주 역전 시장에 늘 있었다.
역은 없어졌지만 기차가 멈추던 플랫폼은 푸른길 공원이 되었고, 지금도 매일같이 새벽장이 선다. 여느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활력이 여전하다. 기차 대신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오는 장꾼들이 새벽시장을 가득 채운다.
5․18의 아픔을 주먹밥으로 함께 했던 시장사람들
5․18 당시 이곳 남광주 시장에 있던 파출소는 시민들의 손에 불태워졌다. 시장 바로 앞 전남대학병원에는 피 흘리는 부상자들이 속속 수레에 실려 도착하는데 경찰들은 시민들을 지키지 못했다. 오히려 계엄군의 협조자가 되었다. 성난 시장사람들은 전남대학병원이 바라다 보이는 남광주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집기를 태웠다.
남광주시장 사람들은 돈을 걷거나 김, 쌀 등을 걷어서 밥을 하고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의 차에 실어주었다. 시장에 살림집을 두고 살던 많은 남광주 상인들은 솜이불로 유리창을 막고, 총알이 들어오는 것을 피해야했다. 그리고 항쟁의 마지막 새벽 시민군들을 향한 총성을 들으며 눈물을 삼켜야했다. 전남대병원 앞에 있는 5․18낙지집은 그러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남광주시장의 새바람 '남광주 밤기차야시장'
남광주시장에 또 다른 바람이 불고 있다. 남광주시장은 행정자치부에서 시행한 2015년 전통시장 야시장 공모사업에 최종 선정되었다. 오랜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2016년 11월 18일 정식으로 개장해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남광주시장상인회와 남광주 해뜨는시장 상인회가 공동으로 조성계획을 수립한 '남광주밤기차야시장'은 추운 겨울밤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붐빈다.
남광주역 광장에는 청년들이 패기와 참신한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푸드트럭이 즐비하다. 음식 맛을 보기위해 긴 줄을 지어 기다리는 큐브스테이크를 비롯해 베트남음식, 양꼬치 구이까지 맛 향연이 이어진다. 긴 기차모양 행렬로 시장 안에 음식 자판들이 이어져 있으니 광장에서 배를 채웠다간 낭패다.
"퇴근하는 길에 아이와 함께 들려봤는데 밤기차시장이라더니 매대들도 귀여운 기차모양을 하고 있어 아이들도 즐거워해서 좋아요!"라고 말하는 젊은 부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야시장을 돌며 한 주의 피로감을 풀어낸다.
비슷한 물건들이 나와있는 것 같지만 이 세상에 같은 시장은 없다. 옆집과 앞집과 뒷집은 나와 비슷한 쌀을 매일 먹지만 어느 집 하나 나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다. 남광주시장에서 만나는 장꾼들에게는 어느 시장보다 강인하고 끈끈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남광주라는 활력 넘치는 자리, 그리고 오랜 시간 그곳을 지켜온 시장의 저력때문인지 모른다.